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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한지성’의 발자취를 따라
성주지역에 한평생을 독립투사로 생활하다 생을 마감한 이가 있어 그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2017-06-20 오전 9:59:07 (주)성주자치신문 mail sjj@sjjnews.co.kr


















    중앙정치학교 졸업 당시의 한지성



    ▲한지성의 출생과 성장 

    1912년 7월 17일. 경북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 509번지에 한 사내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웠다. 그 사내아이는 바로 독립운동가 ‘한지성’이다.


     한재수(韓再洙)가 본명인 그는 독립운동 중 ‘뜻을 이룬다’는 의미로 ‘지성(志成)’이라는 가명을 줄곧 사용했다. 


    한지성은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한문에 능하였고 1926년 가천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 후 대구공립상업학교로 진학했다.


    그의 형 한갑수(韓甲洙) 역시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농업생산 증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구공립농림학교에 입학, 형제가 동시에 대구공립농림학교와 대구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대구공립상업학교시절 운동을 좋아한 한지성은 럭비ㆍ유도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시작과 조선의용대

    한지성이 독립운동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본격적으로 독립투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해는 1929년부터다. 그는 그해 발생했던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31년 3월 대구공립상업학교 졸업 후, 공직과 금융계를 마다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른다. 


    1932년 9월. 중국 국민당이 자신들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설립했던 당시 남경에 위치한 중앙정치대학교 교육학과에 한지성이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에 입학한 조선인은 단 두명뿐이였는데, 그 중 한 명이 한지성이였다.


     입학 후 그는 학과 과정 뿐만 아니라 군사훈련에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한지성은 학교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자연스레 키우게 된다. 


    1936년 8월 학교 졸업 후에는 1936년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지도위원 및 중앙간부로 활동하다 1938년 10월 남경에서 창립한 조선의용대 창립대원 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중국지역에서 창설된 최초의 ‘조선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의 지휘아래 그들은 대적선전, 포로 심문 등의 임무를 도맡았으며, 일본군과 교전을 펼쳤다.


    그러다 1939년 조선의용대 정치조 선전주임과 대본부 편집위원회 중문간 주편을 맡게 되면서 조선의용대 기관지였던 ‘조선의용대(통신)’ 발간을 주관했다. 


    그리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확산되고 있던 1941년 5월 조선의용대의 외교주임으로 활동하며 동남아시아 약소민족과도 연대를 강화해 일본에 대항하기위해 홍콩 등 동남아를 방문하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인면전구공작대

    한지성은 또 1942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제34차 의정원 의원으로 당선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했으며, 김원봉, 김상덕, 이정호 등과 함께 경상지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임시 의정원에 참여한 이는 한지성과 이정호 단 두 명 뿐이였다.


     당시 한지성은 1943년 4월 임시정부의 선전부 총무과 과장을 거쳐 선전위원을 겸임했고, 임시정부의 청년들을 규합해 만든 ‘한국청년회’에서 부총 간사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 중경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1943년 5월 한국을 ‘국제공동관리’에 둔다는 소식을 접하고 연합국의 결정에 반대의사를 표하기 위해 ‘재중국자유한국대회’를 열고 공동관리안의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재중국자유한국대회를 이끈 6명의 주석단에 ‘한국청년회’의 대표로 한지성이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지성은 1943년 8월 인면전구공작대 대장으로서 대원 8명과 함께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된다.


    인면(인도ㆍ버마)전구공작대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인도에 있던 영국군의 요청으로 파견됐다.


    한지성이 인면전구공작대 대장으로 선임된 배경에는 조선의용대의 선전 경험과 개인 어학 능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인면전구공작대는 인도-버마 전선으로 투입돼 대적방송을 비롯한 선전, 포로 심문, 문건 번역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한지성은 대장으로서 대원들을 통솔하고 영국군 인도군총사령부와 협의하며 선전 기술을 기획하는 등 영국군 장교들을 상대로 일본에 대항해 수행할 선전 문제 등의 강연을 펼쳤다. 




    한지성 부부의 결혼 모습



    ▲한지성의 결혼과 생의 마감

     1944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중국 당국과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 기간 연장 등을 논의하기 위해 잠시 중경으로 돌아온 그는 1945년 1월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질녀인(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의 차녀) 안금생과 결혼해 안중근의 조카사위가 됐다.


    그리고 김구의 첫째 아들인 김 인이 안중근의 둘째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과 결혼했기 때문에 김구와도 혼맥으로 연결된 셈이 된다. 


    이후 한지성은 다시 인도-버마 전선으로 돌아갔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9월 중경으로 귀환해 1946년 2월 귀국했다.


    그의 귀국소식에 고향 성주지역에서는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펼쳐졌다.


     해방 후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던 한지성은 그해 8월 ‘제2차 세계 대전문헌’ 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하는 등 그의 조국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나 1948년 평양에서 그의 비보가 전해졌다.


    약산 김원봉 장군, 성주식 선생과 함께 ‘남북한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 한 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사망  연도는 현재까지 미상으로 남았다.



    사진은 인면전구공작대원들이 인도로 파견된 후 촬영된 모습. 앞줄 왼쪽 두 번째가 '한지성'



    사진은 1942년 10월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동했던 당시의 모습

    앞에서 세 번째 줄 오른쪽 세 번째가 '한지성'이다.





    <저작권자©성주자치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7-06-20 09:59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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