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 기사제보 | 즐겨찾기 추가
성주교육지원청
(주)이우텍
6.4 지방선거 누가 뛰나? 정치 | 경제 사회 사람과 사람들 여성 | 문화 농 | 축산 교육 | 청소년 건강 | 스포츠 사설 | 칼럼 기획특집 오피니언 향우 종교 인사 | 동정 도정소식 포돌이 포순이 코리 코미 성주의 문화재 별고을 문중 커뮤니티
별고을 문중
ㆍ전체기사
기사제보
광고문의

가장많이 본 기사
우리신문
이메일 프린트 퍼가기 글자크기 원래대로 글자크기 크게 글자크기 작게
경주 이씨(慶州 李氏) 동락문중(東洛門中) 편
2008-06-25 오후 2:24:00 (주)성주자치신문 mail sjj@sjjnews.co.kr

    경주 이씨의 시조(始祖) 알평(謁平)은 진한(辰韓)때 6부촌(六部村)의 수장(首長)으로서 알천(閼川) 양산촌장(楊山村長)이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길러 신라의 첫 임금으로 추대(推戴)하였다. 신라 유리왕(儒理王) 9년에 이씨(李氏)로 사성(賜姓)받았으며 본관(本貫)은 시조(始祖)의 발상지(發祥地)인 양산촌(楊山村)이 경주(慶州)로 바뀌었으므로 경주로하고, 한때 지명이 월성(月城)이라 일명 월성 이씨(月城 李氏)라고도 하였다.

    그 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이알평의 36세손이며 신라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인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中始祖) 일세(一世)로 하고 있다.

    동락리(東洛里)는 낙동강이 성주군 군계(郡界)를 이루며 남류(南流)하다가 성주(星州)와 고령(高靈)에서 동쪽으로 물길이 돌아가는 곡강부(曲江部)의 강촌(江村)인데 동네 위치가 용암면(龍岩面)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네 이름을 동락리(東洛里)라고 부른다.

    동락리에는 4개 자연부락(東洛, 柯亭里, 豆滿洞, 柯竹亭)이 있는데 그중 동락(東洛)이 가장 크며 1595년(선조28년) 경주 이씨 28세손 이수양(李壽良) 선조공이 동락골에 입향(入鄕)하여 그때부터 모여 살았다.

    1895년(고종32년) 대동방(大同坊)이 대동면(大同面)이 되면서 면사무소가 동락골에 있었다. 1914년 3월 대동면과 두릉면(杜陵面)이 합치어 용두면(龍頭面)이 되고 동락골 입구에 용두면사무소가 있었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용두면과 성암면(聖岩面)이 합하여 용암면이 되면서 면사무소가 현 위치로 옮겨갔다.

    동락골 입구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는 이수양(李壽良)공이 입향하면서 심었기에 부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나무이며 여름철이면 그늘이 좋아 온 동민의 휴식처로 이용되어 왔다.

    경주 이씨 분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판전공파(判典公派),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11개 대파(大派)가 있다.

    그중 동락(東洛)은 국당공파(菊堂公派)의 후손(後孫)인데 17세손 문효공(文孝公) 국당(菊堂) 이 천(李 ?)은 1299년에 성균괴(成均魁)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僉議政丞) 문하시랑(門下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을 역임했다.

    국당공(菊堂公)의 아들인 18세손 문정공(文靖公) 제정(霽亭) 이달충(李達衷)은 1328년에 성균괴(成均魁) 성균제주(成均祭酒) 밀직제학(密直提學) 전리판서(典理判書) 호부상서(戶部尙書)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을 역임했다.

    21세손 월파(月坡) 이 재(李 栽)는 1432년에 등제(登第)하여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들어가 단종(端宗)이 즉위(卽位)하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제수 받았다. 그 후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이 화를 당하자 공(公)이 물러날 것을 주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단종(端宗)이 양위(讓位)하자 병이 나서 대구 매곡촌(梅谷村)으로 내려와 밭이랑에 부치니 이웃사람들도 재상(宰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후손(後孫)은 대구(大邱) 서재(鋤齋), 고령(高靈) 호촌(湖村), 성주(星州), 동락(東洛) 지역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아왔다.

    국당공(菊堂公)의 8세손 충무공(忠武公) 은암(隱菴) 이수일(李守一)은 1583년(선조16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1597년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28세손 이수양(李壽良)공이 1595년(선조28년)에 현재 용암면 동락리에 입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현재 43세손까지 살고 있으며 입향조 후손(入鄕祖 後孫)이 2백(貳百)세대가 넘는데 대구, 부산, 서울 등지로 이주하고 현재는 2십여 세대가 살고 있다.

    동락문중을 중심으로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천은 시호가 문효공(文孝公), 호가 국당(菊堂)이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이다.

    이달충(李達衷)은 시호가 문정공(文靖公), 호가 제정(霽亭)이며 단성보리익찬공신(端誠補理翊贊功臣)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다.

    이 재(李 栽)는 호가 월파(月坡)로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수일(李守一)은 시호가 충무공(忠武公), 호는 은암(隱菴)이며 국당공(菊堂公)의 8세손으로 조선 선조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이진방(李震芳)은 호가 낙애(洛涯)이다. 수호덕(修好德)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벼슬은 구하지 않았으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이상태(李相泰)께서는 1905년부터 1914년까지 대동면장(大同面長)을 역임하였으며, 이상택(李相

    <저작권자©성주자치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8-06-25 14:24 송고
    경주 이씨(慶州 李氏) 동락문중(東洛門中) 편
    최근기사
    회사소개 | 광고/제휴 안내 | 이용약관 | 홈페이지 유지보수 신청
    성주자치신문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2길 43    (T)054-933-3883    (F)054-933-3885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옥현
    Copyright©2014 성주자치신문. All right reserved. mail to : sjj@sjj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