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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주씨(新安 朱氏) 편
2008-06-25 오후 2:21:00 (주)성주자치신문 mail sjj@sjjnews.co.kr

    주씨(朱氏)의 관향(本貫)인 신안(新安)은 현재 중국 안휘성 남쪽에 있는 적례·흡현·황산·휴령·이현·기문 땅과 강서성 동쪽 끝단에 있는 무원을 통틀어 일컫는 지명으로 신안군이라 불렀던 곳이다.
    신안군(新安郡)중에서도 조상들은 무원이라는 곳에서 대대로 살고 있었다.

    본관(本貫)을 신안(新安)으로 하게 된 까닭은 산안주씨(新安朱氏) 원시조(源始祖)인 제치공(制値公) 주 괴께서 군사령으로 무원땅에 부임하여 그의 8세손인 위제공(韋齊公) 주 송(朱 松)까지 세거하시다가 주자(朱子)의 친부(父親) 위제공(韋齊公)이 21歲때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여 관리로 발령을 받고 무원을 떠나 임지(任地)인 우계(尤溪) 건지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고향은 역시 무원이었다.

    회암선생(晦庵先生 : 朱子)께서도 고향땅 신안(新安)을 방문하여 자칭 신안인(新安人) 주 희(朱 熹)라고 여러 사람에게 소개한 바 있다고 하셨다.
    고향 무원 남쪽에 자양산(紫陽山)이 있었는데 고향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없어 고향에서 돌아온 후 서재를 개설하고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 써 붙이니 그곳 사람들은 자양대부(紫陽大夫)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주자(朱子)의 후손들은 본관을 모두 신안(新安)으로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주자(朱子)의 증손으로 고려로 망명오신 청계공(淸溪公) 주 잠(朱 潛)은 남송(南宋)의 한림학사(翰林學士)였는데 조정(朝廷)이 몽고 침입으로 화의(和議)에 기울자 이를 개탄(槪嘆), 가정(嘉定)17年(1224년)에 2남1녀(二男一女)와 문하생 엽공제(葉公濟) 등 7학사(七學士)를 대동하여 고려로 망명하여 전라도 금성(錦城 : 現 羅州)에 정착하였으며, 그 후 후손들이 조선조에 와서 불사이군(不事二君) 파족으로 몰리고 낙도 산간벽지로 분산(分散)하여 입향 세거지에 따라 관향이 능성(陵城), 전주(全州), 압해(押海) 등 그 수가 무려 87개 본관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고종때 원수부(元師府) 기록국총장(記錄局總長)으로 종2품이던 31세손 주석면(朱錫冕) 공(公)이 조선에 거주하는 주성(朱姓)은 모두 주자(朱子)의 후손이니 신안(新安)으로 통일해줄 것을 상소하여 왕의 윤허가 내림으로써 신안 주씨의 복관(復貫)이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청계공(淸溪公)의 사자(嗣子) 여양공(汝陽公) 주여경(朱餘慶)은 고려조 고종(高宗)때 악정(樂正)이 되었으며 이후에 밀직사(密直使)로 증직되었다.
    여양공의 장자(長子)인 문절공(文節公) 주 열(朱 悅)은 1260년 남원판관(南原判官)에 서임(敍任)되었는데, 그의 아랫대에서 크게 3파(派)로 분파 된다.

    첫째, 장파(長派)로 문절공(文節公)의 장자(長子)인 7世 정숙공(正肅公) 주인장(朱印長)은 고려조 충렬왕때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는데 후손들은 주로 전라도지방에 산거하고 있다.

    둘째, 중파(仲派)로 문절공(文節公)의 차자(次子)인 문간공(文簡公) 주인원(朱印遠)은 1277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1278년 안주병마판관(安州兵馬判官)이 1301년에는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를 거쳐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11世 웅성군(熊城君) 주 정(朱 精)은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의금부사(義禁府事)이며, 19世 무열공(武烈公)주몽룡(朱夢龍, 1563∼1633)은 선전관(宣傳官) 금산군수(金山郡守) 유원진병마절제사(柔遠鎭兵馬節制使) 증(贈)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진주 평천서원(平川書院)에서 향사한다.

    25世 회산공(晦汕公) 주광성(朱光成, 1714∼1775)이 개령(開寧)에서 성주(星州) 용암(龍岩)으로 이거(移居)한 성주 입향조가 되시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후손들은 성주군 용암면 지수 및 마월, 대구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지수동(智水洞)에 주자(朱子) 영정을 모신 영각(影閣)이 있다.

    세째, 계파(季派)로 문절공의 3자(三子)인 첨의공(僉議公) 주인한(朱印還)은 첨의부사(僉議府使)에 이르렀다. 후손들은 이북(以北) 각지에 산거하고 있다.

    신안주문을 빛낸 주요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에서 약관도 못되어서 향시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주택정(朱宅正)은 우암 송시열이 덕원에 유배되어 오자 그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고 1679년(숙종5) 식년문과에 올라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이성현감(利城懸監)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화를 입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삭직되었다가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복직되어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 1563∼1633)은 주자(朱子)의 19세손으로 경남 사천시 정동면에서 출생하였으며, 부(父)는 호조참판(戶曹參判) 주 읍이며 (모)母는 선산(善山) 이윤도(李潤道)의 따님이다.

    <저작권자©성주자치신문.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8-06-25 14:2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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